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민당의 2차 북벌 (문단 편집) ==== 국민혁명군의 북벌 준비 ==== 1928년 2월 2일, 난징 정가교의 중앙당부 대회의실에서 국민당 제2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다. 중앙집행위원 [[장런제]], [[리례쥔]], [[차이위안페이]], 진조영, [[허잉친]], [[쑹쯔원]], [[리쭝런]] 등 29명이 참석했고 [[장제스]]는 [[탄옌카이]], [[위유런]]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장제스가 주석단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공산당은 전부터 우리들의 혁명과 본당의 주의에 방해를 가해왔으며 그들의 음모는 백일 하에 드러났다. 우리들은 그들의 콧대를 꺾고 추방했다. 따라서 이 대회에는 순수, 충실한 동지밖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대회야말로 본당 중흥의 호기일뿐만 아니라, 중국 중흥의 다시 없는 기회이다." 2월 7일까지 진행된 4중전회에서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있었다. 연소용공 정책이 모두 취소되었으며 73명의 군사위원회 위원이 선출되었고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주석 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국민정부 주석에는 탄옌카이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명실상부하게 최고 지도자로서의 직위를 확인받은 장제스는 본격적인 북벌에 착수했다. 4중전회가 마무리되자마자 장제스는 진포철로를 따라 북상하여 쉬저우에서 전선을 시찰하였다. 2월 13일, 국민혁명군 재편성이 선포되었다. 허잉친의 제1로군은 제1집단군으로 개편되고 장제스가 직접 1집단군 총사령관에 낮았다. 허잉친은 북벌 전군 총사령부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2월 16일, 카이펑에서 펑위샹, 옌시산의 대표 주진성과 회담한 장제스는 창덕, 대명 및 산서 방향을 지키고 병력을 산동으로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개월 이내에 모든 부대가 베이징에서 집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산동으로 유치의 1집단군 1군단, 진조원의 2군단, 하요조의 3군단, 방진무의 4군단, 손량성의 2집단군 3군, [[마훙쿠이]]의 4군, [[스여우싼]]의 5군, 여수문의 21군, 석액지의 기병 2군을 배치했다. 하북에는 [[쑨롄중]]의 2집단군 2방면군, [[한푸쥐]]의 3방면군, 유기의 8방면군, 정대장의 기병 1군을 배치하고 산서에는 3집단군 전체를 배치하기로 하였다. 장제스는 펑위샹의 국민군을 제2집단군으로 편성할 것을 동의하였고 옌시산의 제3집단군 편성도 인정했다. 그리고 약간 늦게 리쭝런의 제4집단군이 추가되었으며 양수장이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4개 함대를 지휘했다. 1집단군은 18개군, 29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2집단군은 25개군, 31만명, 3집단군은 11개군, 15만명, 4집단군은 16개군과 9개 독립사, 24만 명을 거느렸다. 3월 16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북벌 총방략을 발표했다. 이 북벌 총방략은 방침, 전기 작전 임무 및 부서, 후기 임무 및 부서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지계, 산동, 열하, 차하얼, 수원의 반동 군대를 섬멸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장제스는 당일의 기자회견에서 국민혁명군은 50만에 달하지만 봉천군벌은 이제 20만에 불과함으로 무기와 병력상 모두 우세한 혁명군의 승리를 장담했다. 물론 봉천군벌의 수가 20만에 불과하다는 것은 장제스의 지나친 축소로, 장쭤린은 7개 군단, 80~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3월 31일, 장제스가 장강을 도하하여 북벌군을 쉬저우에 집결하고 <후방 동지들에게 보내는 북벌 출발 보고서>를 발표하여 후방의 장병들이 직무를 다하여 전방의 걱정이 없게 할 것을 주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